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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10/25 아결
  2. 2007/10/25 낙서 - (연중)

아결

글/단편 2007/10/25 21:26

아결(我缺)

 

1.

내가 흐물흐물 흘러내린다. 풀잎에 방울방울 맺힌 이슬이 그러하다. 그 이슬방울에는 일그러진 형상이 갇혀있다. 투영된 게 아니라 엄연히 갇힌 것이다. 나는 그것이 잘 보이지 아니했다. 한참을 그 형상이 무엇인지 궁금하여 뚫어지게 눈을 부라리다 신경질도 나고, 아파서 관두어버렸다.

여튼 이슬에는 무언가가 갇혀있다. 꺼내달라고 휘몰아치는 무엇인가가. 그 이슬의 겉은 매끄러웠다. 아니, 매끄러워 보였다. 나는 차마 그것을 만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념의 봄. 푸른 크리스털은 아직 이슬이 되지 못했다.

봄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이 땅은 메말라있다. 겨울동안 내내 그러했다. 땅은 잠을 모른다. 겨울잠을 자며 동면을 취하는 동물들과도 틀리고, 추위를 피하기 위해 피복을 걸치는 우리와도 틀렸다. 땅은 묵묵히 추위를 맞으며 자신도 얼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땅이 그저 얼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땅은 겨울에도 산다화를 피워내고야 말았다.

그리하여 땅은 쩍쩍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겨울이라는 잡배에게 물을 모두 빼앗긴 까닭이었다.

그런 땅 위로 봄비가 살갑게 내려앉기 시작했다. 나는 하늘을 보며 비를 얼굴에 맞았다. 따가웠다. 빗방울은 굵었다. 내 얼굴에서 파편으로 지워져가는 물방울들은 제각기 다른 곳을 향해 날아간다.

이 땅의 나무들은 아직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시기상 이름이 분명하였으나 비가 적시는 열매를 맛보지 못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퍽 섭섭하였다. 이슬은 어느덧 사라졌다.

아니, 이슬은 그대로지만 내가 찾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물방울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러했다. 실은 이슬은 여느 물방울들과 같았다. 그 만의 특별한 매력을 갖고 있지도, 여섯 모 를 이루는 아름다운 도형도, 아침 해를 머금고 태어나는 아름다운 액체도 아니었다.

그것은 여느 물방울과 다름없던 것이었다. 나는 나의 우매함에 낄낄 대며 웃고 말았다. 이슬이 없어졌으니 나는 이제 다른 장난감을 찾아보아야 했다.

비바람이 더욱 거세어졌다. 이 지친 몸뚱이를 어디론가 끌고가지 아니하면 안되었다. 아무쓸모 없는 몸뚱이를나는 이끌었다. 지친 몸뚱아리로 아무 쓸모없는 내 몸뚱아리를 질질 끌며 산 중턱에 이르렀다. 그리고 한참을 뒤적여 나는 이 몸뚱아리를 뉘일 곳을 찾았다. 나무들이 묘하게 사방을 싸매고 있었다. 그 곳은 짚단을 쌓아놓던 곳 같았다.

짚단을 뜯으며 나는 조금 놀았다. 짚단은 세로로 찢으면 부드럽게 결을 따라 찢어졌다. 하지만 가로로는 당최 뜯기지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금세 그 놀이에 질려버렸다.

비가 광시곡이 되어 귓가에 맴돌고 있었다. 템포는 점점 빨라지고 있었고 연주자의 감정은 고양되고 있었다.

짚단 더미에도 빗물이 새어왔다. 나무들은 더 이상 그늘을 제공해 주지 못했다. 의식이 혼탁해지고 있었다. 감기지 않은 눈 위로 빗물이 맵게 튀어 들어왔다. 사지가 굳어가고 있었다.손가락이 부르르 떨려왔다.

 

2.

비는 이미 그쳐있었다. 젖은 옷들도 모두 말라있었다. 하지만 흙을 적신 물들은 아직 하늘로 올라가지 못했다. 급조된 진흙 웅덩이에는 급조된 뿌연 하늘과 급조된 물방울들이 뭉쳐 접점을 이루고 접점은 접선이 되고 접선은 어느덧 하나의 면이 되어 급조된 감상을 뒷받침한다. 나는 그 능선의 여울을 뒤척이며 나왔다.

뙤약볕이 내리쬐었다. 입이 바삭 바삭 말라왔다. 뜨거운 바람에 거칠게 다뤄진 입술은 어느 샌가 탄력을 잃어 있었다.

딱히 이렇다 할 목표를 두지 않고 걸었다. 눈은 눈. 나는 눈이 아니고 눈은 내가 되지 않는다. 그렇게 걸었다. 자갈 길 위에 나의 발은 이질적인 느낌으로 서로를 맞대고 있었다. 이젠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녹은 땅이 다시 얼어붙기 시작한다. 나무들은 아직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 새벽바람보다 찬 겨울의 바람은 그렇게 닥쳐왔다. 자갈길은 어느새 눈에 파묻혀있었다. 하늘에선 내리다 만 물방울들이 육각을 이루어 가고 있었다.

차가운 바람결이 살결을 에이자 나는 이내 짜증이 치밀었다. 그리고 설움이 북받쳐왔다. 당최 왜 내가 나를 찾지 못한 건지 알 수 없었다. 멀리서 밤이 도달해 있었다. 곧 해가 질 것이었다. 바람이 불어왔다. 서쪽에서 불어온 바람. 익숙지 않은 내음을 가진 바람이었다. 나는 이내 밤이 됨을 느꼈고 달은 물속에 떠 있었다.

별이 진다. 붉은 별. 그 별에 담긴 나도 일그러져간다. 곧 나도 없어져간다. 붉은 별이 진다. 나도 진다. 밤은 이내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세상도 지워진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검디검은 공간.이 곳은 밤일지도 모른다. 결석(缺席)한 나의 꿈!

곧 그 검은 공간에는 작은 점이 생기기 시작한다.점은 점이 되고 점은 점이 된다 점은 점이 되어간다. 잠시 지나자 점은 선이 되고 선은 선이 된다 선은 선이 되어간다.

선은 또 다시 면을 이루기 시작한다. 선은 면이 되고 면은 면이 된다 면은 면이 되어간다. 면은 이내 다시 분립된다. 분립된 면의 도면은 흐릿하다. 하지만 투명하다.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다. 낯익다. 저것은 내가 잊은 무엇일까. 박제된 나의 감정(感情) 일까.

아!

짧은 탄성은 짧은 감상을, 그리고 짧은 후회를 동반해왔다.

“저것은 내 이슬이었구나!”

나는 짧은 숨을 내쉬었다. 내 이슬. 물과 다르지 않을 햇살을 머금은 순결한 액체.

그 액체! 액체! 액체!

이지러진 형상은 아직도 존재했다. 이지러진 형상은 이지러진 채로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지러진 형상 안에는 이지러진 형상이 복수된 개체에서 군체로 존재하고 있었다. 군체는 개체가 되지 아니하였고 개체 또한 군체가 되지 못했다.

이지러진 이슬방울. 한참을 이슬방울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자 그 소우주는 내가 되었고 이슬 또한 내가 되었다. 내가 이지러진 채로 이슬 속에 있었다.

아니 이슬 속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내 속에 내가 있고 그 나는 일그러져 있고 일그러진 우주에는 일그러진 형상과 일그러진 이슬. 아, 나는 일그러져있다.

흘러내리고 있다. 비가 내리면 곧 이 일그러진 우주도 씻겨나간다. 그리고 형체를 잃은 나는 그 빗속에 뒤섞여 일그러져간다. 이슬은 일그러져 있다. 아니 내가 일그러진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이슬이 일그러진 것인가.

나는 일그러져있고 이슬도 일그러져 일그러진 나를 비추고 있기 때문에 이슬 속에 비친 나는 일그러져있었다.

몇 갈래로 나뉜 빛처럼 나는 이렇다 할 본질을 갖지 못했다. 다만 이지러진 내 모습을 이슬에 비춰보고는 이따금 낄낄 거리며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Posted by 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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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 - (연중)

글/단편 2007/10/25 21:24

낙서

 

1.

오늘도 바람에 쇳가루 냄새가 실려 날아왔다. 혓바닥 끝에서 알싸하게 맴돌다가 이내 씁쓸하게 사라졌다. 짧은 느낌이 감질나 혀를 허공에 몇 번이고 내밀어보았지만 나의 환영보다 가벼운 쇳가루는 잠깐 지체했을 뿐, 다시금 도래지를 향해 날아가는 철새 떼처럼 일사불란하게 사라져갔다.

나는 작은 전기난로 한 칸에 몸을 의지하고 있었다. 붉게 상기된 그 기계에는 온기가 흘러넘쳐서 나는 그 기계에 몸을 가까이했지만, 결코 그 곳에 몸을 기대지는 않았다. 넘치는 온기는 자칫하다가는 내게도 그처럼 뜨거운 상처를 입힐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늘은 탁했다. 한바탕 비라도 쏟아진 후가 아닌 이상은 언제나 탁한 오존층이 둥그렇게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오존층에 휩쓸려 내게 날아온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엽서라도 한 장 날아오지 않을까 하며 우체통을 연방 철컹철컹 거리며 확인해보았지만 수북이 쌓여있는 먼지만 손가락에 묻어 시커먼 때를 연상시킬 뿐이었다. ‘잘 계시죠? 저는 잘 있습니다.’ 나는 하늘을 향해 오지도 않은 엽서에 답장을 했다. 빙글빙글 꼬여가는 구름을 보면서 나는 이내 혼절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찡하게 코를 때리는 봄바람이 매섭게만 느껴졌다.

 

 

비도 오지 않는데 나는 이 퉁퉁 불어터진 시간과 절제된 무기력함을 탓하며 연이어 어깨를 두드렸다. 왼쪽을 한참 두드리다가 나는 오른쪽을 두드렸다. 그리고 왼손으로 이내 왼손 어깨를 두드려보려고 애를 쓰다 애꿎은 머리만 아파왔다.

이렇게 있어서는 나도 곧 날개를 잃은 도도새처럼 하늘의 긴 명단에서 내 이름 석자가 지워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것보다 무서운 것은 지긋지긋한 뜨거움이었고 썩어있는 시간이었다. 썩어가는 시간의 악취를 참다못해 나는 겉옷에 쌓인 먼지를 훌훌 털어버리고 일어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 빌어먹을 짜증을 벗어내기 위해서라도 일어나야할 것 같았다. 천장을 수놓고 있는 마름모가 오늘따라 새로워보였다.

 

혹시나 자는 도중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을까 하며 눈 주위를 만져보았지만 메마른 눈 두덩이에는 서릿발이 내려앉을 것만 같았다.

몇 토막씩 끊어져있는 내 유년시절의 기억에서도 내가 눈물을 흘린 기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어머니가 떠나던 날에도, 분명히 내 동공에는 차디찬 가을하늘만이 한 폭의 수채화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2.

달그락 달그락

그릇들이 서로 엉겨 붙어 놀고 있다. 그 위로 어머니의 손이 바삐 움직인다. 일사불란하게 그릇들을 뒤집는 어머니의 손에 차가운 물줄기가 닿는다. 물줄기는 어머니의 손목을 타고 그릇들을 향해 거대한 폭포수처럼 다가간다. 나는 한 줄기 햇살이 먼지들 사이로 수북이 쌓이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나마 눅눅함이 덜했다. 한 뼘 사이의 벽에는 시커멓게 곰팡이가 벽을 좀먹고 있었다.

그리고 몇 날 며칠을 나는 어머니가 식당일을 하시는 것을 오도카니 앉아 구경하면서 내키는 대로 시간들을 하나하나 죽이고 있었다.

늘 오후 2시면 들어오던 햇빛이 사라진 적이 있었다.

쏴아아―

그 날은 비가 왔다. 판자로 엉성하게 지은 어머니의 일터에는 똑똑똑 떨어지는 빗방울들이 연방 휘갈기고 있었다. 나는 슬그머니 일어나서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하기까지의 짧은 시간이 한 없이 길어졌으면 좋겠다고 가슴에 비문을 새겨 넣었다.

한 귀퉁이가 떨어져나간 운동화 속으로 자꾸만 물이 차올랐다. 양말이 시커멓게 변질되고 있었고, 세상도 시커먼 하늘이 뒤덮고 있었다. 우산 하나 없이 쏟아지는 빗방울에 고스란히 어깨를 내주고 바짓가랑이마저 축축하게 젖어 조심스레 대문을 열었다.

안채의 주인집 마당에는 알록달록한 우산들이 객기를 부리며 시멘트로 엉성하게 처발라서 만들어놓은 댓돌에 올라가있었다.

쪼르르 뛰어가 운동화를 뒤집어 처마 밑에 세워놓고 안채를 한 바퀴 돌아 뒤채로 들어갔다. 좁은 나무문이 초라하게 가슴팍을 떠밀었다. 옷을 벗자 벗은 표면적만큼 추위가 덧대어져 왔다. 장판에 녹록히 곰팡이가 슬어 방안에 냄새들이 벌 떼같이 일어나 있었다. 아버지는 나가서 아직 오지 않았다. 나는 어머니가 지난밤 깔아놓은 아버지의 이불을 옆으로 밀치고 작은 농에서 나의 이불을 꺼내어 그곳에 깔아놓았다.

한 없이 낮은 천장을 바라보다 잠이 들었다.

 

 

어스름한 새벽녘이었을 것이다.

‘짝’ 소리가 나의 작았던 이불 밑에 퍼졌다. 나는 바스스한 눈을 연신 비벼대며 주위를 살폈다. 아비저의 다리가 내 머리통 바로 앞에 떡 하니 서있었고 어머니는 장롱 앞에 엎드려 흐느끼고 계셨다. 손으로는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울음소리는 새어나가지 못한 채 밝아오는 여명을 향해 사라지는 이슬과 같이 고요히 지고 있었다. 아버지가 뭐라고 했는지에 대해서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나는 아버지의 화내는 모습을 그날 처음 보았다. 그리고 곧 자주 보게 되었다는 사실만 내 뇌리에 보관되어 있었다. 어쩌면 아버지는 내 기억 속에서 굉장히 큰 오해를 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찌되었건 그 시절은 지나갔고, 회상만 계속되어 흐른다.

그 때 어머니의 눈에서 떨어져 방바닥을 슬며시 적시던 액체를 바라보며 나는 씁쓸히 이질감을 곱씹고 있었다.

몇 개의 해와 달이 뜨고 졌다. 어머니는 근래 들어 자주 식당에서 잠시 없어졌다가 다시 나타나곤 했다. 나는 한 줄기 햇살을 맡으며 어머니가 외출한 공간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더랬다. 그 날 저녁은 유난히 을씨년스러웠다.

옆집 엄씨 할아버지의 초상이 난 날이어서 그랬을까. 그날 저녁엔, 무언가 알 수 없는 초조함이 내 사지를 잡아 뜯고 있었다. 아버지가 빨리 돌아오기만을 빌었다.

어머니보다 아버지가 먼저 돌아오기를 바라며 내 가슴 속 깊은 곳에 있는 호수에 나는 조각배 몇 척을 띄우고 뭍을 향해 돌멩이를 던지고 물결이 퍼지는 것만을 바라보았다.

끼이익

누가 왔는지 궁금해 할 용기조차 없었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내게는 없는 존재만 같았다. 어째서 였을까. 아직 나는 해답을 알 지 못한다. 이불 속에서 떨고 있는 나를 이끌어낸 것은 곱게 차려입은 어머니였다.

“연석아, 가자.”

하지만 문 밖에서부터 길게 방안까지 드리운 그림자는 필시 내가 모르는 사람의 것이었다.

“응? 연석아, 엄마랑 멀리 가자. 새 옷도 입고, 새 집에서 새롭게….”

어머니의 말끝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내 손을 붙잡고 무릎을 굽혀 나와의 눈높이를 맞추었다.

“응? 연석아. 엄마랑 멀리 가자.”

나는 그런 어머니를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어떠한 음성도, 어떠한 접촉도, 어떠한 모습도 내게는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주마등과도 같았다.

“경숙씨,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밖에서 들려오는 낯선 남자의 목소리였다.

“연석아, 가야한다. 어서.”

어머니는 내 눈을 바라보고, 이어 코를 바라보고, 입을 바라보고 말했다.

“……싫어. 난 안 갈래요.”

어머니는 한 번 더 물었고 낯선 사내의 손에 이끌려 방에서 나갔다. 삐그덕 거리는 현관문의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것으로 나와 어머니의 인연은 끝이 났다.

왜 거부했을까. 어머니의 손길.내가 가장 그리워했던 유년의 기억을. 아버지에 대한 동정이나 어머니를 생각해서, 가 아니었다. 나는 이곳에서 울고 싶었다. 애처로운 내 가슴의 고향인, 이곳에서. 그리고 나는 다음날부터 식당에 가지 않았고, 아버지는 소주병을 부여잡은 채로 시간은 무심히 흘러갔다. 이 모든 것이 한 편의 무성영화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어머니는 유독 눈물이 많은 사람이었고, 나는 눈물을 흘리지 못하는 지독히도 메마른 녀석이었다.

 

3.

끈적끈적하게 저녁비가 젖는다. 어깨에는 한 폭에 기명절지화가 펼쳐져있다. 먹을 듬뿍 먹여 나른하게 뿌린 듯 했다. 아침에 내린 비는 저녁에 그친다. 그러한 까닭에 빗방울은 가늘어져있었다. 구두 굽에 담긴 빗물 속에 구름이 질펀하게 엉겨 붙었다. 그 구름은 필시 검을 것이다. 가진 것은 결국 잃는다는 것. 나는 결코 잃고 싶지 않았다. 이 검은 구름도, 이 빌어먹을 슬픔도 우울도 절망도.

낯선 회색 건물. 그 현판에는 ‘15기 부산 태령고 동문회’ 라는 패가 제법 호쾌하게 패어있다. 젖은 구름을 떼어버리고 계단을 밟았다.

철퍽 철퍽

물을 한 입 머금은 바짓가랑이가 물을 토해냈다. 토해낸 물 위에는 샹들리에가 떠있고 회색 계단이 한 없이 헝클어져 담겨 있다.

「3F」

계단에 쓰여진 글자이자 안내판이 눈에 비쳤다. 혹시나 건물주가 나타나 시비라도 걸까봐 나는 어기적거리며 창틀로 다가갔다. 비가 그쳐 있었다. 하늘은 회색 수채화에 물을 한껏 타버린 것처럼 여기저기 덜 닦아낸 회색빛이 감돌았고 도시는 침울하게 젖어있었다. 일렁이는 웅덩이 위로 하나 둘 씩 낯선 그리메가 옹기종기 울타리를 쳤다. 나는 한 층을 내려가 그들을 바라보기로 했다.

4.

나는 고독하고 싶었다. 아버지가 목을 메단 날부터였을까.

세상이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모래들과 같이 느껴졌다. 후-, 하고 불면 풀썩이며 먼지만을 일으키고 다시 가라앉아 버리는, 그런 모래들처럼

최소한 나만은 모래들 사이로 불쑥 튀어나오는 눈에 거슬리는 돌덩이가 되어야 했다. 돌덩이가 된다면 나는 아무런 상념 없이, 짧게 붓을 쥐고 앉아 볕 잘 드는 마당에서 하늘을 노래하며 이젤에 햇빛을 한 컵 가득 엎지를 수도 있을지 모른다. 돌덩이가 되기 위해 우선 나는 고요해질 필요가 있었다. 삭막하고 투박한 것은 바위의 몫. 고요하고 잔잔하지만 모래 사이에서 신발에 흠집을 내며 존재의 의의를 잊지 않는 , 그런 날카로운 돌덩이가 되어야 했다.

혼자 남는 것은 고요가 아니다. 그것은 비애이자 낭만. 내가 낭만적이면서 비애로운 작자가 될 수는 없었다. 나는 수많은 사회와 범람의 인해人海에 빠져들어야 했다.

그리고 늘 고독하고 싶었다.

5.

낯선 그림자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골목 속을 향해 사라졌다. 구름이 개이자, 맑은 하늘이 흐를 거라던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어느덧 황혼이 하늘을 뒤덮었고 태양은 무리를 짓는 구름들 사이로 점멸하고 있었다.

나는 다시 길을 떠났다. 아니, 발걸음을 떼었다는 표현이 더 좋으리라. 나는 아직 ‘길’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낯선 도시에서 맞게 되는 황혼. 그 황혼을 배경으로 내 눈 앞에 나타나는 막다른길. 애당초 나는 갈 곳이 없었던 게 아닐까. 나의 꿈은 어느덧 결석하고 말았다. 비어있는 자리에는 더 이상 조의 깊은 조화가 놓여있지 않았다. 조화는 시들고 이내 낡은 삶의 한 줌 먼지로 사라져간다. 잊혀진 시간의 골목 사이로 익숙한 멜로디가 풍겨져 나온다. 의식되지 않은 공간에서 점차 그 영역을 넓힌다.

「watashi to waltz wo」

알 수 없는 언어로 쓰인 노래는 알 수 없는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음악에 젖어 이 도시를 모든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도시는 아직 나를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스르르 안개처럼 녹아들어 이 도시에 잠적하는 하나의 작은 생명. 누구도 알아갈 필요가 없고 누구도 알아낼 필요가 없었다. 단지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이익에 의해 몸을 흔들 따름이었다. 여느 도시가 그렇듯이, 이 침울한 도시의 외곽에는 주거지들이 밀집해 있었고 주거지가 밀집되어있는 곳에는 당연히 그렇듯이 갈색으로 가라앉은 모노톤의 골목들과 담벼락들이 새하얀 내 두 눈을 잠식하고 있었다. 시야는 가려졌고 나 역시 모노톤으로 빠져들어 세상은 이내 나와 합일(合一)시 되기 시작했다. 몽환적인 낯선 도시는 내게 몽환적인 감상을 불러일으켰고 그것은 이내 현실과 망상의 경계를 허물고 나를 이 몽환의 도시 속 현세의 마지막 인류라도 된 듯 한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Posted by 하유